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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민감함을 회복하라

쿠스스토리 2019. 11. 27. 06:00

​​영적 민감함을 회복하라

​2019년 11월 27일 / 매일성경 /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일곱교회 중 마지막 교회의 지명인 ‘라오디게아(Laodicea)’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부유한 산업도시였습니다. 섬유와 의학이 발달한 이 도시의 주민들은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라오디게아 교회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자립할 수 있었고 풍성하기 이를 데 없이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평가는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칭찬할만한 그 어떤 근거로 찾지 못했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미적지근한 신앙의 행태로 인해 주님은 심지어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는 표독스런 표현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일곱 교회를 등급으로 매긴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비유는 지리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근교에 있는 강물은 흙탕물이라 식수로 사용하기 어려워 약 8km 정도 떨어진 온천수에 수로를 연결하여 사용했습니다. 뜨거운 온천물이 수로를 따라 라오디게아로 올 때는 미지근해졌기에 이 상황을 빗대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들의 신앙과 닮아있음을 표현하신 것이지요.

신앙에서 중간이란 없습니다. 차디찬 각성으로 영혼을 깨우게 하든 뜨거운 은혜로 영혼을 회복하게 하든 둘 중하는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차가운 신앙이나 뜨거운 신앙은 둘 다 몸과 영혼을 일깨워주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반면 미지근한 신앙은 영적으로 둔하게 만듭니다.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신앙은 주님을 모르는 것만 못한 모습인 것이지요.

바로 영적 무관심, 무기력, 구원에 대한 냉소적 반응 등 이러한 모습들이 주께서 역겨워 하시는 미지근한 신앙 행태입니다. ‘영적인 둔감함’은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도록 차단합니다. 예배의 자리는 앉아있지만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예배자의 진실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형식와 외식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앙인 것이지요.

혹시 우리 신앙의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것은 아닙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인생(딤후3:5)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영혼이 경건의 모양을 넘어 경건의 능력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적 민감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민한 영성은 미적지근한 신앙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자극하는 차갑고도 뜨거운 원동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자극과 각성이 없는 신앙은 언제고 무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수 알기를 사모하고,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며, 뜨거운 기도와 찬양을 열망하는 신앙이 영적 민감함을 회복할 뿐더러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역사(계3:20)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미적지근한 신앙을 과감히 버리고 다시금 내 영혼을 쳐 복종시킴으로 오늘도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하심에 긴밀히 반응하는 영적 민감함을 회복해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 영혼의 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기민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은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누려야할 경건의 능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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