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그랜마.
"본진이는 내 아들이라요!"
죽음과의 사투 때문인지 할머니의 정신은 섬망으로 온전하지 않았다. 다행히 잠시 손주를 알아보시고 상처로 뒤덮인 입술을 겨우 열어 파르르 떨며 처음 건네신 말, “미안하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혹시 알아듣지 못하실까봐 난 할머니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렇게 마음을 전했다. “아니야. 할머니. 전혀 미안해 하실 필요없어. 난 할머니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지 몰라. 고마워요. 사랑해요. 할머니.” 그리고 이내 참지 못한 눈물. 서로가 그렇게 흐느껴 울었다. 곧 정신을 잃으시고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본진이는 내 아들이라요!”다. 이 말이, 할머니가 나에게 들려준 마지막 말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참 혹독하셨다. 많이 엄하셨다. 매질도 많이 하셨다. 누구라도 알까. 내가 얼마나 할머니를 무서워했는지. 결혼하기 직전까지 할머니와 살며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바라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와의 동행은 너무 힘들었다. 과연 할머니는 손주를 사랑하긴 한 걸까. 늘 의문이었고 의심했었다. 그러다 내가 군입대 하는 날. 인사를 드린 후 돌아서려는 찰나, 할머니는 날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리셨다. 항상 크게만 느껴졌던 할머니의 존재. 그날은 유독 작았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외로움과 심약함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 때 처음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을 느꼈다.
난 할머니를 원망했지만 사랑했다. 할머니는 항상 엄격하셨지만 늘 내 걱정만 하셨다. 이제 나는 안다. 할머니가 날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만하니까 이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그래서 안타깝고 미안하고 슬프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투병 중 의식이 어느 정도 있으셨을 때, 아버지 통해서 들은 말. 상처 난 부위를 드레싱 하던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 손주가 목사라요.” 한없이 부족한 목사. 그래도 할머니는 목사인 나를 자랑스러워 하신 것이다.
엄청난 고통 속에 할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의 흔적이 담긴 그녀의 주검을 목격한 순간,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통곡했다. 고생길만 가득했던 그녀의 여정 마지막이 꼭 이랬어야만 했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나 할머니 얼굴을 바라보며 나의 마지막 말을 건넸다. “할머니, 고생했어요. 고마워. 사랑해. 천국에서 만나.”
그렇게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다음 날. 아버지 집 근처 바닷가에 앉아 아내와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유독 바다가 깊고 파도가 슬픈 순간이었다. 수평선 너머 할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본진이는 내 아들이라요!”라고 부르짖는 그녀의 진심에 나도 외쳐 본다. “맞아. 할머니. 난 할머니 아들이야!”
할머니는 30년 동안 나를 위해 사셨다. 책임지지 않아도 될 손주를 끝까지 책임지셨다. 목사가 되겠다고 한 손주를 많이 반대하셨지만 그 반대를 뚫고 신학교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목회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돼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그렇게 기도하셨다.
그녀의 기도, 그녀의 헌신 그리고 그녀의 사랑. 감사했다. 그리고 죄송하다. 하지만 할머니로부터 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그녀의 신앙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이 유산을 꼭 나누는 인생이 되고 싶다. 너무 슬프지만 슬픔을 딛고 내게 주어진 길을 가려 한다. 너무 보고 싶지만 천국에서 할머니와 재회할 그 날을 꿈꾸며 다시 내일을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옮긴다.
주저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물을 머금고 손을 흔들며.. 이제는 미소로 할머니를 떠나 보내려 한다. 미소가 이쁜 우리 할머니, 故 이춘자 권사를 추억하며! ‘굿바이, 그랜마.’



